
금요일 오후, 잘 굴러가던 함수 하나를 AI에게 맡긴다.
"이거 좀 깔끔하게 리팩터링해줘." AI는 5초 만에 답을 내놓는다.
중간에 뜬금없이 박혀 있던 sleep(200) 한 줄, 아무도 이유를 모르던 어색한 null 체크, 있으나 마나 해 보이는 재시도 로직 — 전부 지웠다.
30줄이 18줄로 줄었다.
테스트는 초록불.
리뷰어도 "깔끔해졌네요 👍" 하고 승인.
머지.
그리고 2주 뒤 새벽 3시, 알림이 울린다.
초록불이 거짓말을 하는 순간
이쯤에서 나올 법한 교훈은 뻔하다.
"AI가 짠 코드는 꼼꼼히 리뷰해야 한다." 그런데 잠깐, 당신은 리뷰를 했다.
오히려 전보다 읽기 좋아졌고, 테스트도 다 통과했다.
리뷰어도 두 명이나 봤다.
문법도, 로직도, 스타일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제는 리뷰의 성실함이 아니었다.
그 sleep(200)은 3년 전 어느 결제사 API가 요청을 너무 빨리 받으면 간헐적으로 중복 승인을 때리던 버그를 막으려고, 누군가 이틀 밤을 새운 끝에 박아 넣은 방어선이었다.
주석은 없었다.
그 사건을 겪은 사람은 이미 퇴사했다.
코드만 보면 그건 그냥 '지저분한 한 줄'이다.
AI는 그 한 줄이 왜 거기 있는지 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건 "이 코드는 지금 이 파일 안에서 불필요해 보인다"까지다.
그리고 그건 리뷰어인 당신도 마찬가지였다.
울타리를 왜 세웠는지 묻는 사람
100년 전 G.K.
체스터턴이 남긴 유명한 비유가 있다.
들판 한가운데 쓸모없어 보이는 울타리가 서 있다.
개혁가가 말한다.
"이거 왜 있는지 모르겠네, 치워버리자." 체스터턴은 답한다.
"그 울타리를 왜 세웠는지 당신이 설명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걸 치우게 놔둘 수 없소."
엔지니어링에서 흔히 '체스터턴의 울타리'라 불리는 이 원칙은, 지금까지는 조금 고루한 조언이었다.
신중한 시니어가 성급한 주니어를 붙잡을 때 쓰는 말.
그런데 AI가 코드를 쓰기 시작한 순간, 이 원칙의 무게중심이 통째로 옮겨갔다.
AI는 역사상 가장 유능한 울타리 철거업자다.
눈앞에 보이는 중복, 죽은 듯한 분기, 쓸데없어 보이는 예외 처리를 확신에 차서, 놀랍도록 깔끔하게 걷어낸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어떤 새벽의 장애로부터 태어났는지는 영원히 모른다.
코드베이스에는 '무엇을'과 '어떻게'는 남지만, '왜'는 거의 남지 않기 때문이다.
값이 오르는 자산과 값이 떨어지는 자산
여기서 커리어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장을 '더 빨리, 더 많이 짜는 능력'으로 이해해왔다.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간다는 건 손이 빨라지는 것, 아는 문법과 프레임워크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짜는가'는 이제 가장 빠르게 값이 떨어지는 자산이 됐다.
AI가 거의 공짜로, 당신보다 빠르게 대신 해주니까.
값이 오르는 자산은 반대편에 있다.
왜 그렇게 짜여 있는가를 아는 것. 저 재시도 로직이 어떤 실패를 막고 있는지, 이 이상한 데이터 모델이 어떤 비즈니스 예외를 견디려고 저 모양인지, 지워 보이는 저 코드를 왜 지우면 안 되는지.
AI가 자신 있게 부수려는 것 앞에서 "잠깐, 그거 이유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이 시대에 몸값을 지키는 능력이다.
시니어리티는 짠 코드의 총량이 아니라, 축적한 '왜'의 총량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
그런데 여기 함정이 있다.
이 '왜'는 문서를 읽어서 얻어지지 않는다.
컨퍼런스에서도, 잘 정리된 아티클에서도 얻을 수 없다.
오직 울타리가 세워지던 그 현장에 있었어야 얻어진다.
새벽에 걸린 온콜 당번,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10년 된 레거시, 다들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장애 회고 미팅 — 주니어들이 커리어에 도움 안 된다며 도망치는 바로 그 자리들이, 사실은 값이 오르는 자산이 주조되는 유일한 대장간이다.
지루한 포스트모템에서 "아, 그래서 그 줄이 거기 있었구나"를 몸으로 아는 순간, 당신은 AI가 100년이 지나도 읽어낼 수 없는 무언가를 갖게 된다.
이직으로 연봉을 올리고, 화려한 사이드 프로젝트로 이력서를 채우는 건 '어떻게'의 자산을 쌓는 일이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 쌓은 사람은 AI와 정확히 같은 트랙에서, AI와 경쟁하게 된다.
AI가 모든 코드를 대신 써주는 시대에,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짠 코드가 아니라 당신이 못 지우게 막은 코드에 남는다.
울타리를 세운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들판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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