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요즘 앤트로픽(Anthropic)의 클로드 코드(Claude Code)를 붙잡고 산다.
터미널에 앉혀두고 코드를 짜고, 고치고, 문서 정리까지 맡긴다.
웬만한 주니어 개발자 몫은 거뜬히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 요즘 AI 없이 일 못 하겠다는 사람 많다.
인정한다.
나도 그렇다.
막히는 코드도 척척 짜주고, A4 열 장짜리 문서도 3초 만에 씹어서 요약하고, 밤새 고민한 문제를 한 방에 풀어버린다.
솔직히 말하면 천재다.
나보다 똑똑하다.
그런데 이 천재한테, 좀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다.
어젯밤 늦게까지 같이 프로젝트를 붙잡고 씨름했다.
합이 기가 막혔다.
내가 뭘 원하는지 척하면 척, "이제 좀 통하네" 싶었다.
든든한 동료를 하나 얻은 기분으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새 창을 열고 말했다.
"어제 우리가 하던 거, 이어서 하자."
돌아온 대답.
"어떤 작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뭐?
어제 그 새벽 감성 다 어디 갔어?
다시 설명해주면, 이번엔 어제 분명히 "이렇게 하지 말자"고 정한 방식으로 코드를 짜온다.
어제 합의한 규칙?
기억 안 남.
어제의 맥락?
증발.
심지어 가끔은 뜬금없이 딴 얘기를 하거나, 엉뚱하게 오동작한다.
매일이 이렇다.
천재는 천재인데, 매일 아침 나를 처음 본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데, 세상에서 제일 건망증 심한 동료.
이쯤 되면 천재라는 말, 반은 거짓말 같지 않은가?
그러다 며칠 전,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다시 봤다.
그리고 무릎을 탁 쳤다.
이거였구나.

매일 아침, 어제를 잃는 여자
「첫 키스만 50번째」(50 First Dates, 2004).
줄거리는 이렇다.
여주인공 루시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하루치 기억만 유지되는 병을 앓는다.
매일 밤 자고 나면 그날 기억이 통째로 지워진다.
그래서 아침마다 사고 나기 전날로 돌아가 눈을 뜬다.
그녀에게는 매일이 '그날 이후 첫 번째 아침'인 것이다.
남자 주인공 헨리가 그녀에게 반한다.
문제는, 어제 아무리 사랑에 빠졌어도 오늘 아침이면 루시는 헨리를 처음 보는 사람 취급한다는 것.
그래서 헨리는 매일, 처음부터 다시 그녀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별별 방법을 다 쓴다.
실패하고, 다시 하고, 또 실패하고.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해법이 있다.
매일 아침 루시가 보는 '복습 비디오테이프'. 사고가 있었다는 것, 지금이 몇 년도인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헨리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까지 전부 담겨 있다.
루시는 매일 아침 그 테이프를 보고, 지워진 어제를 오늘에 이어 붙인다. 그렇게 둘은 관계를 이어간다.
눈치챘겠지만, AI가 딱 루시다
새 세션은 매번 '사고 다음 날 아침'이다.
어제가 없다.
천재적인 두뇌는 그대로인데, 어제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 답도 영화가 이미 알려준 셈이다.
복습 테이프를 만들면 된다.
그래서 실험해봤다.
클로드 코드랑 신나게 일하고, 헤어지기 전에 시켰다.
"오늘 우리가 뭘 했고, 어디까지 왔고, 뭘 정했는지 — 다음에 열 사람이 읽고 바로 이어갈 수 있게 기록해둬."
다음 날.
새 세션을 열고, 그 기록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거 먼저 읽어. 어제의 너다."
그러자 — 이어졌다. 어제의 맥락도, 우리가 정한 규칙도, 내렸던 결정도 복원해서, 마치 밤을 새운 적 없다는 듯 그대로 이어서 일했다.
루시가 테이프를 보고 어제로 돌아오듯이.
그 테이프는 어디에 굽나 — 옵시디언
그 '복습 테이프'를 나는 옵시디언(Obsidian)에 굽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클로드 코드가 정리해주는 기록은 결국 마크다운(.md) 파일이고, 옵시디언은 그 .md를 세상에서 제일 깔끔하게 다루는 노트 앱이기 때문이다.
AI가 "오늘 한 일"을 .md로 남기면 옵시디언 금고(Vault)에 차곡차곡 쌓인다.
세션이 바뀌든, 폰에서 노트북으로 넘어가든, 그 파일 하나만 열어 AI에게 읽히면 어제가 소환된다.
영화와 딱 하나 다른 점
루시의 복습 테이프는 헨리(사람)가 만들어 줬다.
하지만 AI의 복습 테이프는 — AI가 직접 쓴다. 내가 받아 적는 게 아니다.
헤어질 때 "기록해둬" 하면 스스로 옵시디언에 정리하고, 다음 날 "읽어봐" 하면 스스로 읽는다.
쓰는 것도 AI, 읽는 것도 AI.
나는 그 테이프를 어제 세션에서 오늘 세션으로, 폰에서 노트북으로 옮겨주는 사람일 뿐이다. 기억의 운반자, 혹은 스위치.
그러니 "AI가 천재냐"고 다시 묻는다면, 아까 그 말은 정정하겠다.
천재 맞다.
단지 매일 아침 복습이 필요한 천재일 뿐이다.
그 복습만 챙겨주면, 어제의 천재가 오늘 그대로 출근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해볼 것
- 세션 끝내기 전: "오늘 한 것·결정·다음 할 일을 옵시디언 노트로 기록해둬" — 테이프 굽기
- 새 세션 시작할 때: "이 .md 먼저 읽고 이어가자" — 테이프 재생
- 기기를 옮길 때도(폰 → 노트북) 똑같이 — 기억은 흘러가는 대화가 아니라 남는 파일에 맡긴다
어제의 천재를 오늘 다시 만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잊기 전에 적어두게 하고, 만나면 읽게 하는 것.
20년 전 로맨스 영화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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